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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랜드 공화국
Саландска Република
Republic of Saland
파일:싸볘트국기.png
국기
국장
국기 (1934-1945)
국장 (1934-1945)
Хлеб, земља, слобода![1]
빵, 땅, 자유!
상징
국가
Марш црвене руже
붉은 장미의 행진
[2]
위치
1917년 3월 16일 ~ 1949년 10월 7일
이전 국가
이후 국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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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혁명·임시정부 수립 1917년 3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1918년 11월
농노제 폐지 1918년
헌법 제정·공화국 출범 1920년
사랜드 공산당 창당 1921년
크라슬리스크 천도 1923년
대공황 1929년
페트코비치 쿠데타 1934년 5월
추축국 가담 1941년
페트코비치 체포 1944년
휴전 1945년 5월
과도정부 수립 1945년
붉은 혁명 시작 1946년 4월 12일
인터그라드 함락 1949년 8월
사비에트 수립 선포 1949년 10월 7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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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
남랜드 평원, 북부 고원, 카스탄 산지, 남부 해안
수도
크라슬리스크 (1923–1949)
인터그라드 (1917–1923)
최대도시
국토 면적
약 3,010,000km²
접경국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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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65,200,000명 (1930년 인구조사)
언어
사랜드어(공용어)
카스탄어, 타르타르어, 고랜드어 등
종교
사랜드 정교회(다수)[3]
이슬람, 가톨릭, 불교 등
민족
사랜드인(남슬라브계), 카스탄족,
타르타르족, 고원인 등
군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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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단일국가
임시정부 (1917~1920)
→ 이원집정부제 공화제 (1920~1934)
→ 군사독재 (1934~1945)
→ 과도정부 (1945~1949)
국가원수
대통령 (직선, 임기 7년)[4]
정부수반
입법부
국민의회(하원)
원로원(상원)[5]
주요 인물
밀란 S. 보이노비치 (초대 대통령)
니콜라 T. 스타노예비치 (제2대 대통령)
드라고슬라프 M. 페트코비치 (국가재건위원회 의장)
스테판 R. 일리치 (과도정부 총리)
경제
통화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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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랜드어
Саландска Република
(Salandska Republika)
Саланд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Republic of Saland
République de Saland
Republik Saland
사랜드 공화국
サランド共和国

1. 개요2. 상징
2.1. 국기2.2. 국장2.3. 국가
2.3.1. 붉은 장미의 행진2.3.2. 재건의 노래
3. 역사4. 자연환경5. 인문환경
5.1. 인구5.2. 민족5.3. 언어5.4. 종교5.5. 도시5.6. 행정 구역
6. 정치
6.1. 1920년 헌법6.2. 대통령6.3. 의회6.4. 정당6.5. 내각6.6. 군부 정권6.7. 과도정부
7. 외교
7.1. 루이나7.2. 라 마베라7.3. 소련7.4. 독일과 이탈리아7.5. 동사랜드와 북산
8. 경제9. 사회
9.1. 해방 이후의 농촌9.2. 도시와 노동9.3. 여성9.4. 교육9.5. 소수민족
10. 문화
10.1. 아방가르드의 시대10.2. 문학10.3. 미술과 건축10.4. 영화와 음악10.5. 1934년 이후
11. 군사12. 여담

1. 개요 [편집]

사랜드 공화국(사랜드어: Саландска Република 살란드스카 레푸블리카)은 1917년 3월 16일 장미 혁명으로 제정 사랜드의 마지막 차르 라자르 2세가 퇴위한 때부터 1949년 10월 7일 사비에트가 수립될 때까지 32년 동안 존속한 국가이다. 이 기간은 임시정부(1917~1920), 1920년 헌법에 따른 의회 공화정(1920~1934), 페트코비치의 군부 정권(1934~1945), 종전 뒤의 과도정부(1945~1949)로 나뉜다. 군부 정권 아래에서도 1920년 헌법과 '공화국'이라는 국호는 형식상 유지되었다.

장미 혁명을 이끈 것은 공화파 정치인과 자유주의 지식인, 도시 노동자 조직이었다. 공화파의 밀란 S. 보이노비치가 이끈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계속하기로 했고, 1918년 11월 협상국이 이기면서 사랜드는 형식상 승전국이 되었다. 하지만 수백만의 인명과 경제를 대가로 치른 승리는 새 정부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1918년 농노제 폐지와 보통선거를 선포했지만,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과 땅을 요구하는 농민들이 옛 영지를 점거하면서 평원은 무정부 상태에 가까워졌다. 임시정부는 군을 동원해 점거를 해산하고 토지 개혁을 제헌의회로 미뤘는데, 이 결정이 이후 30년 동안 사랜드 정치를 짓누른 토지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1920년 제헌의회가 제정한 헌법은 임기 7년의 직선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고 내각은 의회에 책임을 지는 이원집정부제와, 하원인 국민의회와 상원인 원로원의 양원제를 채택했다. 보이노비치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공화국은 1923년 제정의 상징인 인터그라드를 떠나 평원 중부의 공업 도시 크라슬리스크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공화국 정치는 내내 불안정했다. 의회는 지주 정당·도시 자유주의 정당·농민당·사회주의 정당으로 쪼개져 안정된 다수를 만들지 못했고, 1920년부터 1934년까지 14년 동안 내각이 23차례 바뀌었다. 농노제는 폐지되었지만 토지 개혁은 지주 출신 의원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어, 해방된 농노 상당수는 옛 지주의 소작농으로 남았다. 동남부 카스탄족이 요구한 언어·교육 자치도 단일 국가 원칙에 막혔다. 1921년에는 사회주의 정당의 급진파가 떨어져 나와 사랜드 공산당을 창당했고, 이듬해 이오시프 노스탈린이 서기장에 올랐다.

1929년 대공황으로 곡물 가격이 폭락하자 평원의 농촌은 파산 상태에 빠졌고, 1932년 각지에서 소작 폭동과 공장 점거가 잇따랐다. 의회 정치가 혁명을 막지 못한다고 본 지주·기업가·장교단을 등에 업고 1934년 5월 페트코비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국가재건위원회를 세웠다. 군부 정권은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당을 불법화하고 이탈리아식 조합주의를 도입했으며, 국기·국장·국가를 모두 바꾸었다. 1941년에는 추축국과 조약을 맺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공산당은 무장 조직 인민군을 결성해 파르티잔 투쟁에 나섰고, 1944년 가을 전황이 기울자 군부 온건파가 페트코비치를 체포하고 연합국과 휴전 교섭에 나섰다. 1945년 5월 휴전이 발효되었을 때 평원의 도시와 철도는 대부분 파괴되었고, 전쟁 사망자는 약 300만 명에 이르렀다.

휴전 뒤 연합국 관리위원회의 감독 아래 스테판 R. 일리치 총리의 과도정부가 들어서 1920년 헌법과 공화국의 상징을 되살렸지만, 행정과 군의 요직은 여전히 군부 정권 출신이 차지했다. 해방구에서 이미 지주의 땅을 나눠주고 있던 인민군은 무장 해제를 거부했고, 1946년 3월 총선이 부정 선거로 끝나자 4월 12일 총공세에 나섰다. 이것이 붉은 혁명이다. 1949년 봄 수도 크라슬리스크가, 8월에는 과도정부의 마지막 거점 인터그라드가 함락되었고, 일리치를 비롯한 과도정부 지도부는 해외로 망명했다. 1949년 10월 7일 노스탈린이 크라슬리스크에서 사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사랜드 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1917년의 장미 혁명을 '미완의 혁명', 1949년의 붉은 혁명을 그 완성으로 규정하며, 그 사이의 공화국을 지주와 장교들이 혁명을 가로챈 시대로 그린다. 반면 인터그라드 포위 때 해외로 빠져나간 사비에트 망명자 사회는 공화국을 '잃어버린 사랜드'로 기억했고, 공화국의 삼색기는 수십 년 동안 망명자 사회의 상징으로 쓰였다.

2. 상징 [편집]

2.1. 국기 [편집]


사랜드 공화국의 국기는 깃대 쪽에 흰 세로띠를 두고, 나머지를 위의 하늘색 띠와 아래의 붉은 띠로 나눈 깃발이다. 흰 띠는 깃발 너비의 약 2/9를 차지하고, 하늘색과 붉은색은 세로로 5:2의 비율로 나뉜다. 흰색은 자유를, 하늘색은 평원의 물길과 하늘을, 붉은색은 장미 혁명의 붉은 장미와 혁명에서 흘린 피를 뜻한다. 제정의 자주·금·백 삼색기에서 차르의 색인 자주와 금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만든 깃발이다.
색상
HEX
흰색
#FFFFFF
하늘색
#00A9F3
붉은색
#EB1B24

이 깃발은 1917년 4월 임시정부가 처음 내걸었고, 1920년 헌법이 국기로 확정했다. 제헌의회에서는 붉은 띠의 폭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사회주의 정당은 혁명을 기리는 붉은 띠를 넓히자고 했고, 지주 정당과 자유주의 정당은 줄이자고 맞섰는데, 결국 지금의 좁은 붉은 띠로 타협했다. 훗날 공산당 선전물은 이를 두고 "공화국의 붉은 띠는 토지 개혁만큼 좁았다"고 비꼬았다.

1934년 쿠데타 뒤 국가재건위원회는 붉은 띠를 혁명과 사회주의의 색으로 보고 깃발에서 지웠다. 군부 정권의 국기는 흰 세로띠와 하늘색 바탕만 남기고, 흰 띠 가운데에 국가재건위원회의 문장을 넣은 것이었다. 1945년 과도정부는 1920년의 삼색기를 되살렸다. 내전 동안 이 삼색기는 과도정부 쪽의 깃발이 되었고, 사비에트 수립 뒤에는 금지되었다.

2.2. 국장 [편집]


1920년 헌법이 정한 공화국의 국장은 하늘색 방패에 흰 물결 띠를 가로로 놓고, 그 위에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얹은 모양이다. 방패 둘레는 밀 이삭과 참나무 가지가 감싸고, 아래 리본에는 국호 'Саландска Република'가 적혀 있다. 제헌의회에서는 제정의 그리핀을 정치색 없는 민족의 상징으로 남기자는 안도 나왔지만 표결로 부결되었고, 차르관이 있던 방패 위 자리는 비워 두었다.

군부 정권의 국장은 흰 방패에 금색 '재건의 다발'을 넣은 것이다. 재건의 다발은 일곱 개의 밀대와 칼 한 자루를 끈으로 묶은 모양으로, 일곱 밀대는 국가가 지정한 일곱 직능 조합을 뜻했다. 방패는 날개를 편 금색 그리핀이 가슴에 안고 있는데, 공화국이 버린 제정의 그리핀을 되살린 것은 옛 귀족과 장교단을 끌어안으려는 정권의 성격을 보여 준다. 1945년 과도정부는 1920년의 국장을 되살렸다.

2.3. 국가 [편집]

2.3.1. 붉은 장미의 행진 [편집]

〈붉은 장미의 행진(Марш црвене руже, 1917–1934, 1945–1949)〉

장미 혁명 때 인터그라드 거리에서 불린 노래로, 1920년 헌법에서 국가로 정해졌다. 곡조는 붉은 장미를 표식으로 쓰던 인터그라드 노동자 공제회의 장례 행진곡에서 왔고, 거리에서 불리던 가사를 시인 베라 스토야노비치(Вера Стојановић, 1889년 ~ 1951년)가 다듬었다. 후렴의 '빵, 땅, 자유'는 그대로 공화국의 표어가 되었다.

1934년 군부 정권이 국가에서 빼고 공식 행사에서 부르는 것을 금지했으나, 1945년 과도정부가 되살렸다. 내전 동안에는 과도정부군과 인민군이 같은 노래를 불렀는데, 인민군은 2절의 "밭을 간 자가 거두게 하라"를 특히 힘주어 불렀다고 한다.

가사 [펼치기ㆍ접기]
절
사랜드어
번역
1
Носимо ружу на грудима,
црвену попут нове зоре;
падају окови вековни,
слобода корача кроз град!
우리는 가슴에 장미를 달았네,
새 새벽처럼 붉은 장미를.
백 년 묵은 사슬이 떨어지고,
자유가 도시를 걸어간다!
후렴
Хлеб, земља, слобода!
Напред, народе Саланда!
빵, 땅, 자유!
앞으로, 사랜드의 인민이여!
2
Од равнице до планина
нек' се чује наш корак:
ко је орао, нек' жање,
ко је пао, нек' се памти!
평원에서 산까지
우리의 발걸음이 들리게 하라.
밭을 간 자가 거두게 하고,
쓰러진 자는 기억되게 하라!

2.3.2. 재건의 노래 [편집]

〈재건의 노래(Песма обнове, 1934–1945)〉

군부 정권이 1934년 〈붉은 장미의 행진〉을 대신해 국가로 정한 곡이다. 국가재건위원회 선전국이 가사를 공모해 고르고, 육군 군악대장 브라니슬라프 요키치(Бранислав Јокић, 1891년 ~ 1960년)가 곡을 붙였다. 학교와 직능 조합의 모든 행사에서 부르도록 의무화되었으나, 1944년 페트코비치가 체포된 뒤 군에서부터 부르지 않게 되었고 1945년 과도정부가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가사 [펼치기ㆍ접기]
절
사랜드어
번역
1
Устај, Саланде, из пепела,
ред и рад нек' нас воде;
један народ, једна воља,
једна застава над нама!
일어나라, 사랜드여, 잿더미에서.
질서와 노동이 우리를 이끌게 하라.
하나의 민족, 하나의 의지,
하나의 깃발이 우리 위에!
후렴
Ред и обнова!
Саланд изнад свега!
질서와 재건!
무엇보다 사랜드를!

3. 역사 [편집]

상세 내용은 사랜드 공화국/역사 문서 참고.

시기
기간
국가원수·지도자
임시정부
1917~1920
밀란 S. 보이노비치
의회 공화정
1920~1934
보이노비치 → 스타노예비치
군부 정권
1934~1944
페트코비치
과도정부
1944~1949
일리치

1917년 3월 16일 장미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자 공화파 정치인 밀란 S. 보이노비치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계속하는 한편, 1918년 4월 해방 포고로 1,200년 가까이 이어진 농노제를 폐지하고 영주가 쥐고 있던 수문과 수로를 마을의 수문 공동체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땅은 옛 영주의 것으로 남았다. 물은 마을이, 땅은 지주가 쥐는 '반쪽 해방'은 이후 30년 동안 공화국을 짓누른 토지 문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1920년 헌법으로 공화국이 정식 출범한 뒤에도 정치는 안정되지 않았다. 의회는 지주 정당·도시 자유주의 정당·농민당·사회주의 정당으로 쪼개졌고, 1920년부터 1934년까지 14년 동안 내각이 23차례 바뀌었다. 물을 쥔 마을과 땅을 쥔 지주는 평원 곳곳에서 물 파업과 소작 분쟁을 벌였으며, 토지 개혁 법안은 번번이 원로원에서 막혔다. 1929년 대공황으로 곡물 가격이 폭락하자 농촌은 파산했고, 1932년 소작 폭동과 공장 점거가 잇따르는 가운데 사랜드 공산당이 크게 세를 불렸다.

1934년 5월 드라고슬라프 M. 페트코비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재건위원회를 세웠다. 군부 정권은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당을 불법화하고 이탈리아식 조합주의를 도입했으며, 1941년 추축국에 가담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사랜드군은 서부 전선에서 라 마베라와 루이나 원정군에 맞섰고, 후방에서는 이오시프 노스탈린이 이끄는 인민군의 파르티잔 투쟁이 벌어졌다. 1944년 10월 군부 온건파가 페트코비치를 체포하고 휴전 교섭에 나섰으며, 1945년 5월 휴전이 발효되었을 때 전쟁 사망자는 약 300만 명에 이르렀다.

종전 뒤 스테판 R. 일리치의 과도정부가 1920년 헌법을 되살렸지만, 해방구에서 땅을 나눠 준 인민군은 무장 해제를 거부했다. 1946년 3월 총선이 부정 선거로 끝나자 4월 12일 인민군이 총공세에 나서면서 붉은 혁명이 시작되었고, 1949년 8월 인터그라드 함락으로 과도정부가 무너졌다. 1949년 10월 7일 노스탈린이 사비에트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사랜드 공화국은 32년 만에 막을 내렸다.

4. 자연환경 [편집]

공화국의 영토는 제정 말기와 같았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사랜드는 형식상 승전국이었지만 라 마베라와의 국경에는 변화가 없었고, 1919년 청평 남부의 푹하이 조차지와 콘스탄티노폴 조계를 반환하면서 해외 영토도 사라졌다. 국토 면적은 약 301만 km²였고, 이 가운데 약 74만 km²가 북부 고원이었다. 지형과 기후, 하천에 관해서는 제정 사랜드 문서를 참고할 것.

공화국 시기에는 평원의 물 이용이 크게 달라졌다. 1918년 수문과 수로가 마을의 수문 공동체로 넘어가자, 물을 잃은 지주들은 디젤 양수기로 지하수를 퍼 올리는 우물을 자기 땅에 파기 시작했다. 1920년대 평원 서부와 중부에는 이런 지주의 '사설 우물'이 수만 개 생겨났고, 일부 지역에서는 지하수위가 눈에 띄게 낮아져 마을 우물이 마르는 일이 벌어졌다. 물을 둘러싼 마을과 지주의 다툼은 강물에서 땅속으로까지 번진 셈이었다.

1930년대 군부 정권은 공공사업의 하나로 스베틀라 강 중류에 대규모 댐을 짓기 시작했다. 1937년 착공한 스베틀라 댐은 평원 중부의 관개와 크라슬리스크 공업 지대의 전력을 함께 공급하려는 사업이었지만, 전쟁으로 공사가 늦어져 공화국 시기에는 끝내 완공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내전은 평원 곳곳의 수로와 둑, 철도를 파괴했고, 1945년 이후 평원 서부의 관개 농지 상당 부분이 다시 습지와 황무지로 돌아갔다.

5. 인문환경 [편집]

5.1. 인구 [편집]

공화국은 1930년 두 번째 전국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1902년 제정의 첫 조사 이후 28년 만이었다. 조사 결과 공화국의 인구는 1억 6,520만 명이었으며, 도시 인구 비율은 1902년의 14%에서 21%로 높아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와 1918~1920년 과도기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꾸준히 늘었는데, 이는 농노제 폐지 뒤 농촌의 결혼과 이동이 자유로워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반면 1940년대는 인구의 재앙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300만 명, 1946~1949년 내전에서 약 180만 명이 죽었고, 내전 막바지에는 수십만 명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1950년 사비에트가 발표한 추계는 이 시기의 손실을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5.2. 민족 [편집]

민족
비율(1930)
사랜드인
49.9%
고원인
19.4%
11.5%
7.1%
대월계 동부민
4.6%
외국계
0.6%
기타
6.9%

1920년 헌법은 사랜드를 '사랜드 인민의 단일 국가'로 규정했다. 민족별 자치는 인정되지 않았으며, 제정 시기 변경민으로 따로 분류되던 고원인·타르타르인·대월계 동부민도 법적으로는 모두 같은 공화국 시민이 되었다. 시민권의 평등은 진보였지만, 동시에 제정이 변경에 허용하던 고유의 법과 자치가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원인과 카스탄족의 자치 요구는 공화국 내내 단일 국가 원칙에 막혔다.

5.3. 언어 [편집]

공용어는 사랜드어였다. 1919년 임시정부의 철자 개정으로 단어 끝의 ъ와 모음 ѣ 등이 폐지되고 ј·љ·њ 같은 새 문자가 정식으로 도입되어, 지금의 사랜드어 철자가 확립되었다. 1920년 헌법은 사랜드어를 '국가의 언어'로 정했지만 다른 언어의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5년 군부 정권은 출판법으로 카스탄어 출판을 금지했다.

러시아어는 공화국 시기에도 공식적인 지위가 없었다. 다만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은 간부가 많았던 사랜드 공산당에서는 러시아어가 당 문서와 간부 교육의 사실상 공용어였고, 이는 1949년 사비에트 수립 뒤 러시아어가 연방 공용어가 되는 배경이 되었다.

5.4. 종교 [편집]

1920년 헌법은 국교 제도를 폐지하고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선언했다. 사랜드 정교회는 국가 기관이던 성무원의 지위를 잃었고, 세속 감독관 제도가 사라졌으며, 1652년 이후 차르가 임명하던 총대주교는 다시 주교들이 선출하게 되었다. 교회가 소유한 수로와 수문도 1918년 해방 포고에 따라 마을로 넘어갔다.

정교회는 여전히 인구의 60% 이상이 믿는 최대 종교였지만, 공화국과의 관계는 차가웠다. 교회는 국교 지위를 잃은 데 반발했고, 1920년대 초 총대주교는 공화국을 '하느님을 잊은 나라'라 부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교회의 상당 부분은 1934년 쿠데타를 환영했으며, 군부 정권은 정교회에 학교 종교 교육을 되돌려주며 이에 보답했다. 이 협력은 1950년 이후 대정리 때 정교회가 혹독한 탄압을 받는 빌미가 되었다.

5.5. 도시 [편집]

도시
인구(1930)
비고
236만
최대 도시
182만
수도(1923~)
71만
자톤
63만
항구
52만
고원
베레스니크
33만
타라크
19만
카스탄 산지

1923년 공화국은 제정의 수도였던 인터그라드를 떠나 평원 중부의 공업 도시 크라슬리스크로 수도를 옮겼다. 천도의 명분은 제정의 상징에서 벗어나 평원의 한가운데에서 새 나라를 시작한다는 것이었고, 실제로는 옛 귀족과 관료가 몰려 있는 인터그라드에서 정부를 떼어 놓으려는 뜻도 있었다. 크라슬리스크에는 1925년부터 1931년까지 모더니즘 양식의 정부 청사 지구가 새로 지어졌다. 그러나 인터그라드는 공화국 내내 최대 도시이자 경제와 문화의 중심으로 남았고, 옛 귀족과 관료층의 근거지가 되었다.

5.6. 행정 구역 [편집]

1921년 행정구역법은 제정의 총독부를 모두 폐지하고 전국을 64개 현으로 다시 나누었다. 고원 총독부는 고원 4개 현으로, 카스탄 총독부는 카스탄 산지 2개 현으로 쪼개져 일반 현이 되었으며, 1784년 병합 조약 이래 고원에 유지되던 이슬람 법정과 부족 원로 회의도 함께 폐지되었다. 단일 국가 원칙에 따른 조치였지만, 고원인들은 이를 병합 조약의 일방적 파기로 받아들였다. 1922~1923년 아바나를 비롯한 고원 곳곳에서 이슬람 법정 폐지에 반대하는 시위와 납세 거부가 이어졌고, 공화국은 이를 군대로 진압했다.

현에는 내무부가 임명하는 현지사를 두었고, 현 아래의 군과 시에는 주민이 직접 뽑는 의회가 생겼다. 제정 시기 영주가 쥐고 있던 영지 안의 재판·경찰·징세권은 1918년 해방 포고로 모두 국가로 넘어왔다.

6. 정치 [편집]

6.1. 1920년 헌법 [편집]

1920년 6월 제헌의회가 제정한 헌법은 사랜드를 '사랜드 인민의 단일 민주 공화국'으로 규정했다. 헌법은 국민 주권과 법 앞의 평등, 21세 이상 남녀의 보통·평등·비밀 선거, 언론·결사·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선언했다. 신분제는 폐지되었고, 귀족 칭호는 법적 효력을 잃었다.

권력 구조는 바이마르식 이원집정부제였다. 국민이 직접 뽑는 임기 7년의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총리를 임명하고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으며, 총리가 이끄는 내각은 하원인 국민의회의 신임에 의존했다. 대통령은 또 '공공의 안녕과 질서가 중대하게 위협받을 때' 법률을 대신하는 긴급명령을 내릴 수 있었는데(제52조), 1932년 이후 이 조항은 의회를 우회하는 통치의 도구가 되었다.

헌법의 가장 큰 공백은 토지였다. 1918년 해방 포고가 농노를 해방하고 수문과 수로를 마을에 넘겨주었지만, 땅을 어떻게 나눌지는 제헌의회의 몫으로 미뤄져 있었다. 제헌의회는 지주 출신 의원들의 반대로 끝내 토지 조항을 넣지 못했고, 헌법에는 '토지 제도는 법률로 정한다'는 한 줄만 남았다. 이 법률은 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다.

6.2. 대통령 [편집]

상세 내용은 사랜드 공화국 대통령 문서 참고.

대
이름
재임
1
1920~1927
2
1927~1938
3
고이코 R. 바소비치
1938~1944

초대 대통령은 장미 혁명 당시 임시정부를 이끈 공화파의 밀란 S. 보이노비치였다. 1927년 선거에서는 지주 정당의 지원을 받은 니콜라 T. 스타노예비치가 재선에 도전한 보이노비치를 꺾었다. 1934년 5월 쿠데타는 스타노예비치의 임기가 끝나기 직전에 일어났는데, 국가재건위원회는 그를 대통령 자리에 그대로 앉혀 둔 채 선거를 무기한 미루었다. 일흔이 넘은 스타노예비치는 1938년 죽을 때까지 위원회가 내미는 포고에 서명하는 허수아비 대통령이었고, 그가 죽은 뒤 위원회는 은퇴한 판사 고이코 R. 바소비치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바소비치는 1944년 10월 페트코비치가 체포되자 사임했고, 이후 1949년까지 대통령직은 비어 있었다. 과도정부 시기에는 총리 스테판 R. 일리치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6.3. 의회 [편집]

의회는 하원인 국민의회(Народна скупштина)와 상원인 원로원(Сенат)의 양원제였다. 국민의회는 비례대표제로 뽑는 400명의 의원으로 이루어졌고 임기는 4년이었다. 원로원은 현 의회가 간접선거로 뽑는 의원 96명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의원 24명으로 이루어졌으며 임기는 8년이었다. 원로원은 국민의회의 법률안을 한 번 거부할 수 있었는데, 간접선거와 긴 임기 때문에 지주와 옛 관료층이 원로원을 장악했고, 1924년 토지 개혁 법안을 부결시킨 곳도 원로원이었다.
정당
1920
1924
1928
1932
국민보수당
104
112
121
109
공화민주당
118
79
92
41
사랜드 농민당
86
84
80
66
61
88
70
72
-
14
19
61
재건 전선
-
-
-
38
소수민족 정당
19
13
11
9
기타
12
10
7
4

국민의회 선거 결과(의석, 총 400석). 1920년은 제헌의회 선거.

1934년 쿠데타로 의회는 해산되었고, 군부 정권기에는 국가재건위원회가 입법권을 행사했다. 의회는 1946년 3월 과도정부의 총선으로 다시 구성되었지만, 이 선거는 부정 선거로 끝나 내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6.4. 정당 [편집]

  • 국민보수당: 옛 대귀족과 지주, 정교회 보수층의 정당. 제정 시기 사보르의 '차르와 땅 연합'을 이었으며, 토지 개혁에 끝까지 반대했다. 공화국 시기 원내 제1당인 경우가 가장 많았고, 과도정부 총리 스테판 R. 일리치도 이 당 출신이다.
  • 공화민주당: 도시 상공업자와 지식인, 전문직의 자유주의 정당으로, 제정 시기 헌정당의 후신이다. 장미 혁명과 임시정부의 주역이었으며 보이노비치의 정당이었다. 1920년 제1당이었으나 토지 문제에서 지주와 농민 사이를 오가다 지지를 잃었고, 대공황 이후 급격히 몰락했다.
  • 사랜드 농민당: 옛 국가 농노 마을과 수문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농민 정당. 토지 개혁을 요구했지만 혁명이 아닌 법률로 이루겠다는 온건 노선을 지켰다.
  • 사랜드 사회당: 1917년 장미 혁명 뒤 합법화된 사회주의 정당. 도시 노동자와 출가 농노 출신 노동자를 기반으로 했으며, 1924년 첫 사회당 총리를 냈다. 1921년 급진파가 떨어져 나가 공산당을 만들었다.
  • 사랜드 공산당: 1921년 사회당 급진파가 창당했고, 1922년부터 이오시프 노스탈린이 서기장을 맡았다. 1920년대에는 의석이 적었으나 대공황 이후 급성장했다. 1934년 불법화되었다.
  • 재건 전선: 1930년 체르나 고지 전선의 퇴역 장교들이 만든 극우 반공 운동. 1932년 처음 의석을 얻었으며, 1934년 쿠데타 뒤 국가재건위원회의 관제 대중 조직인 '재건 연맹'으로 흡수되었다.
  • 소수민족 정당: 카스탄 인민당과 고원 이슬람 연합 등. 언어·교육 자치를 요구했으나 단일 국가 원칙에 막혔다.

6.5. 내각 [편집]

1920년부터 1934년까지 14년 동안 내각이 23차례 바뀌었고, 10명이 총리를 지냈다. 어느 정당도 국민의회 과반을 얻지 못해 모든 내각이 둘 이상의 정당이 손잡은 연립 내각이었으며, 토지·수리권·예산 문제로 연립이 깨질 때마다 내각이 무너졌다. 1932년 이후에는 대통령이 의회의 신임과 관계없이 총리를 임명하고 긴급명령으로 예산을 집행하는 이른바 '대통령 내각'이 이어졌다. 전체 내각 목록은 사랜드 공화국 대통령 문서에 있다.

6.6. 군부 정권 [편집]

상세 내용은 국가재건위원회 문서 참고.


1934년 5월 9일 쿠데타로 세워진 국가재건위원회는 의장 페트코비치와 장군 8명, 민간 관료 4명으로 이루어진 군부 정권의 최고 기구였다. 위원회는 의회를 해산하고 입법권을 행사했으며, 총리직을 없애고 의장이 정부를 직접 이끌었다. 1920년 헌법은 폐지되지 않고 '정지'되었을 뿐이어서, 군부 정권은 형식상 공화국 헌법 아래의 비상 체제를 자처했다. 위원회는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당,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노사를 국가가 지정한 일곱 개의 직능 조합으로 묶는 조합주의 체제를 도입했다.

6.7. 과도정부 [편집]

1944년 10월 군부 온건파 장군 오그녠 D. 라스토비치가 페트코비치를 체포하자 국가재건위원회는 해체되었다. 1945년 5월 휴전 뒤에는 연합국 관리위원회의 감독 아래 국민보수당 출신의 스테판 R. 일리치가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과도정부를 이끌었다. 과도정부는 1920년 헌법과 공화국의 상징을 되살리고 페트코비치를 비롯한 군부 지도부를 전범으로 재판했지만, 행정과 군의 요직은 여전히 군부 정권 출신이 차지했다. 1946년 3월 총선은 인민군 해방구를 제외한 채 치러졌고, 투표함 바꿔치기와 유권자 협박이 횡행한 부정 선거로 끝났다.

7. 외교 [편집]

7.1. 루이나 [편집]

공화국 초기 루이나는 가장 가까운 우방이었다. 루이나는 1917년 임시정부를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같은 협상국 편에 섰다. 공화국은 제정의 대외 채무를 승계했는데, 그 가운데 약 3분의 2가 루이나에 대한 것이었다. 1925년 두 나라는 채무 조정 협정을 맺어 상환 기간을 늘렸고, 1920년대 후반 루이나 자본은 인터그라드의 방직공장과 평원의 양수기 사업에 활발히 투자했다.

관계를 깨뜨린 것은 대공황이었다. 곡물 가격이 폭락해 수출 대금이 바닥나자, 공화국은 1932년 7월 제정 채무의 상환을 일방적으로 유예했다. 루이나 의회는 사랜드산 곡물에 보복 관세를 매겼고, 루이나 언론은 공화국을 '채무 불이행국'이라 불렀다. 1934년 쿠데타 뒤 국가재건위원회는 제정 채무를 '차르와 지주의 빚'이라며 사실상 부인했고, 이탈리아·독일과 가까워지면서 루이나와의 관계는 적대로 돌아섰다. 1941년 사랜드가 추축국 편에 서자 루이나는 원정군을 보내 라 마베라와 함께 해협 남부 서부 전선에서 사랜드군과 싸웠다.

종전 뒤 루이나는 연합국 관리위원회의 주요 구성국으로서 과도정부를 감독했다. 그러나 1946년 내전이 시작되자 루이나는 과도정부를 돕지 않았다. 과도정부의 주축이 추축국 편에서 싸운 군부 정권 출신이었던 데다, 루이나 자신은 전후 제헌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2. 라 마베라 [편집]

서쪽 이웃 라 마베라와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적국으로 공화국을 시작했다. 1918년 동맹국의 패배로 라 마베라가 휴전을 청했지만, 공화국은 서부 전쟁에서 잃은 벨라 강 서안을 되찾지 못했다. 1920년대 두 나라는 국경 조약을 맺고 교역을 재개했으나, 벨라 강 서안의 실지 회복 요구는 공화국 정치에서 끊이지 않았다.

군부 정권은 이 실지 회복론을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1941년 6월 사랜드군은 벨라 강을 건너 라 마베라를 침공했고, 이번에는 연합국 편에 선 라 마베라가 루이나 원정군과 함께 이를 막았다. 같은 해 라 마베라 땅의 일부에서 한국계 이주민들이 유고랜드를 세운 뒤로 공화국의 서쪽 국경에는 유고랜드도 함께 맞닿게 되었다.

7.3. 소련 [편집]

공화국은 1924년 소련을 승인하고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 사랜드 공산당을 지도했고, 공화국 정부는 이를 내정 간섭으로 보았다. 1934년 국가재건위원회는 소련과의 국교를 끊었고, 노스탈린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으로 망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내전 동안 소련은 인민군에 노획한 추축국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보냈으며, 이는 1949년 사비에트 수립의 바탕이 되었다.

7.4. 독일과 이탈리아 [편집]

반공을 국시로 내건 국가재건위원회는 1930년대 후반 독일·이탈리아와 가까워졌다. 위원회는 이탈리아의 조합주의를 정치 체제의 모델로 삼았고, 1937년 반코민테른 협정에 가입했으며, 1938년 독일과 곡물·광물을 무기와 교환하는 청산 협정을 맺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뒤 한동안 중립을 지키던 위원회는 1941년 3월 3국 동맹 조약에 가입했고, 같은 해 6월 참전했다.

7.5. 동사랜드와 북산 [편집]

동쪽 롱 강 너머의 남꽝 왕국은 1929년 북산이 청평을 침공하면서 북산의 보호국인 '동사랜드 왕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공화국은 동쪽 국경에 북산의 영향력이 뻗쳐 온 것을 경계했지만, 대공황 속에서 이에 맞설 힘이 없었다. 1945년 9월 혁명으로 동사랜드 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동사랜드는 인민군의 후방 기지가 되었고, 1947년 4월 사랜드 공산당과 동사랜드 노동당이 맺은 띠엔화 협정에 따라 동사랜드 인민적군이 롱 강을 건너 과도정부군을 공격했다.

8. 경제 [편집]

상세 내용은 사랜드 공화국/경제 문서 참고.


공화국 경제의 출발점은 1918년 4월 해방 포고였다. 포고는 약 7,700만 명의 농노를 해방하고 영주가 쥐고 있던 수문과 수로를 마을의 수문 공동체에 넘겨주었지만, 땅은 옛 영주의 소유로 남겨 두었다. 그 결과 평원의 관개 농업은 물을 쥔 마을과 땅을 쥔 지주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를 막을 수 있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지주는 마을이 물을 대 주지 않으면 땅을 놀려야 했고, 해방된 농민은 지주의 땅을 빌리지 않으면 물이 있어도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대부분의 농민은 수확의 절반을 바치는 소작농이 되었고, 마을이 지주의 땅으로 가는 수문을 닫는 '물 파업'과 지주가 소작농을 쫓아내는 '땅 봉쇄'가 1920년대 내내 평원 곳곳에서 되풀이되었다.

공업은 제정의 유산 위에서 출발했다. 크라슬리스크의 국영 병기창과 제철소는 1921년 국영 기업인 크라슬리스크 공업 공사로 개편되었고, 인터그라드의 방직공장은 루이나 자본과 함께 1920년대 후반의 짧은 호황을 이끌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으로 곡물 가격이 폭락하자 수출에 기대던 경제는 무너졌다. 1932년 곡물 가격은 1928년의 38%로 떨어졌고, 공화국은 그해 7월 제정 채무의 상환을 유예했다.

1934년 이후 군부 정권은 노사를 일곱 개의 직능 조합으로 묶는 조합주의 경제를 도입하고, 공공사업과 군비 확장으로 실업을 흡수하려 했다. 1936년 수리관리법은 수문 공동체의 수문을 국가 수리청 관리로 옮겼는데, 수리청은 지주의 땅에 물을 우선 배분해 사실상 1918년의 성과를 되돌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평원의 곡물과 광물이 추축국의 전쟁 물자로 실려 나갔고, 1944~1946년에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1946년 과도정부는 구 디나르 100만을 신 디나르 1로 바꾸는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9. 사회 [편집]

9.1. 해방 이후의 농촌 [편집]

1918년 해방 포고는 농노에게 신분의 자유를 주었다. 해방된 농민은 영주의 허가 없이 결혼하고 이주하며 재산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영주의 재판과 체벌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땅이 없는 자유는 곧 소작의 자유였다. 1930년 기준 평원 농가의 약 62%가 소작농이었고, 소작료는 대개 수확의 절반이었다.

농촌의 새로운 권력은 수문 공동체였다. 1918년 수문을 넘겨받은 수문 공동체는 물을 나누는 순서와 수세를 정하고, 지주의 땅에 물을 댈지 말지를 결정했다. 수문 공동체 회의는 농민들이 스스로 정치를 배우는 학교가 되었고, 1920년대 사랜드 농민당과 사회당의 농촌 조직은 대부분 수문 공동체를 기반으로 했다. 1930년대 공산당이 평원의 소작농을 조직할 때 파고든 곳도 수문 공동체였다. 1936년 군부 정권이 수문을 국가 수리청으로 옮긴 것은, 이 수문 공동체를 정치적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확대가족 공동체인 자드루가는 해방 뒤 빠르게 해체되었다. 젊은 세대가 도시로 떠나거나 독립된 소작 계약을 맺으면서, 1930년 무렵 평원에서 전통적인 대가족 자드루가는 소수만 남았다.

9.2. 도시와 노동 [편집]

해방은 도시로의 대이동을 불러왔다. 영지에 묶여 있던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 자톤으로 몰려들었고, 도시 인구 비율은 1902년 14%에서 1930년 21%로 높아졌다. 1919년 임시정부는 8시간 노동제와 노동조합의 자유를 법으로 정했으며, 1920년대 노동조합은 사회당과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34년 군부 정권은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노동자를 국가 지정 직능 조합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9.3. 여성 [편집]

1920년 헌법은 21세 이상 여성에게 남성과 같은 선거권을 주었다. 1920년 제헌의회에는 여성 의원 11명이 선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다수가 장미 혁명을 시작한 인터그라드 방직공장 여공 출신의 노동 운동가였다. 1920년대에는 여성의 대학 입학과 전문직 진출이 늘었다. 군부 정권은 '가정과 조국'을 내세워 여성의 공직 진출을 제한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남성 노동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여성을 공장에 대거 동원했다.

9.4. 교육 [편집]

1922년 초등교육법은 4년제 초등 의무교육을 정했다. 교회 부속 학교 대신 국가와 군·시가 세운 공립 학교가 늘면서 문해율은 1902년 19%에서 1930년 41%로 높아졌다. 다만 학교는 도시와 큰 마을에 몰려 있었고, 고원과 카스탄 산지의 문해율은 20%를 넘지 못했다. 1924년에는 새 수도에 크라슬리스크 국립대학이 세워졌다. 1935년 군부 정권은 학교에 정교회 교리 교육을 되돌리고 카스탄어 교육을 금지했다.

9.5. 소수민족 [편집]

공화국은 모든 시민의 법적 평등을 선언했지만 민족 자치는 인정하지 않았다. 동남부의 카스탄족은 카스탄어 학교와 지방 자치를 요구했으나 단일 국가 원칙에 막혔고, 1935년 군부 정권이 카스탄어 출판을 금지하자 산지에서 무장 저항이 일어났다. 군부는 이를 군대로 진압했으며, 산지로 숨어든 공산당 활동가와 카스탄 저항 세력의 연계는 훗날 인민군 해방구의 토대가 되었다.

북부 고원의 고원인들은 1921년 고원 총독부가 일반 현으로 쪼개지고 이슬람 법정이 폐지된 데 반발했다. 1922~1923년의 시위와 납세 거부는 진압되었지만, 고원인들 사이에서 공화국은 1784년 병합 조약을 깬 나라로 기억되었다.

10. 문화 [편집]

10.1. 아방가르드의 시대 [편집]

1917년 장미 혁명과 함께 제정의 사전 검열이 사라지자, 사랜드 문화는 폭발적으로 꽃피었다. 1920년대는 흔히 '공화국의 아방가르드 시대'로 불린다. 제정의 국가 후원 낭만주의가 고대 제국의 계승을 노래했다면, 공화국의 예술가들은 기계와 도시, 해방된 농민과 공장 노동자를 그렸다. 신고대 양식의 그리핀과 아치는 '차르의 장식'으로 조롱받았고, 직선과 원색의 기하학이 그 자리를 채웠다.

10.2. 문학 [편집]

1920년대 문학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장미 혁명을 노래한 시인 베라 스토야노비치(1889~1951)를 중심으로 한 혁명 시의 흐름이었다. 국가 〈붉은 장미의 행진〉의 가사를 다듬은 그녀는 1920년대 자유시와 구어체 실험으로 사랜드어 시를 바꾸어 놓았다. 다른 하나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세대의 '체르나 세대' 문학이었다. 소설가 밀로시 투린(1894~1967)의 《체르나의 겨울》(1929)은 체르나 고지 참호에서 농노 출신 병사들이 겪은 죽음과 환멸을 그린 작품으로, 공화국 시기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었다.

10.3. 미술과 건축 [편집]

미술에서는 화가 이반 라도이치치(1891~1960)가 이끈 '평원 기하' 그룹이 아방가르드를 대표했다. 이들은 평원의 수로와 경작지를 원색의 직선과 면으로 분해한 추상화로 이름을 얻었다. 건축에서는 사랜드 최초의 여성 건축가 안카 보시냐크(1893~1972)가 1925년부터 1931년까지 크라슬리스크 정부 청사 지구를 설계했다. 장식을 걷어 낸 하얀 콘크리트 건물들이 넓은 광장을 둘러싼 이 청사 지구는 새 공화국의 얼굴이었으며, 사비에트 시기에도 정부 청사로 쓰였다.

10.4. 영화와 음악 [편집]

1920년대 인터그라드와 크라슬리스크에는 영화관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감독 스레텐 비다코비치(1898~1971)의 무성영화 《수문》(1926)은 1918년 수문을 넘겨받은 한 마을과 옛 영주의 대립을 그린 작품으로, 공화국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음악에서는 인터그라드의 카페와 클럽을 중심으로 재즈가 유행했고, 평원 민요를 현대 관현악으로 다시 쓰는 작곡가들이 나타났다.

10.5. 1934년 이후 [편집]

1934년 쿠데타는 아방가르드의 시대를 끝냈다. 국가재건위원회는 사전 검열을 부활시키고, 아방가르드 예술을 '민족을 썩게 하는 퇴폐 예술'로 규정했다. 1936년 크라슬리스크에서는 압수한 작품들을 조롱하며 늘어놓은 전시회 〈썩은 물길〉이 열렸다. 영화 《수문》은 상영이 금지되었고, 베라 스토야노비치는 집필을 금지당했으며, 많은 예술가가 해외로 떠났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고대 제국의 상징과 군대식 질서를 뒤섞은 관제 '재건 양식'이었다.

공화국의 예술가들은 1949년 이후에도 평탄하지 못했다. 사비에트는 이들을 '부르주아 형식주의자'로 몰았고, 베라 스토야노비치는 1950년 대정리 때 체포되어 이듬해 노동교화소에서 죽었다. 공화국의 아방가르드가 재평가된 것은 1990년대 재편기 이후의 일이다.

11. 군사 [편집]

상세 내용은 사랜드 공화국군 문서 참고.


사랜드 공화국군은 1917년 제국군을 이어받은 임시정부의 군대에서 출발해, 1920년 헌법으로 육군·해군·공군을 갖춘 공화국군으로 재편되었다. 농노제가 폐지되면서 영지별 할당 징병은 사라지고, 21세 이상 모든 남성이 2년간 복무하는 보편 징병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장교단은 제정 시기의 귀족 장교와 제1차 세계 대전 체르나 고지 전선 출신의 젊은 장교들로 채워졌고, 이 '체르나 세대' 장교들이 1934년 쿠데타의 주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공화국군은 약 210만 명을 동원해 서부 전선에서 라 마베라군과 루이나 원정군에 맞섰다. 1941년 6월 벨라 강을 건넌 초기 공세는 1942년 봄 루이나 원정군의 도착으로 멈추었고, 1943년 9월 연합군의 벨라 강 도하 이후 서부 전선은 무너졌다. 후방에서는 카스탄 산지와 고원 가장자리의 인민군 해방구를 상대로 한 소탕전이 이어졌다. 1944년 10월 군부 온건파가 페트코비치를 체포한 뒤 군은 친페트코비치 부대와 과도 군부로 갈라졌고, 1945년 5월 휴전 때까지 국토는 세 갈래로 찢겼다. 전쟁 중 군인 사망자는 약 120만 명이었다.

1945년 이후 과도정부군은 인민군과의 내전에서 병력과 중화기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징집병의 대규모 탈영과 군부 정권 출신 장교들의 파벌 다툼 속에 무너졌다. 1949년 8월 인터그라드 함락으로 공화국군은 사라졌고, 일부 장교와 병사들은 해외로 망명했다.

12. 여담 [편집]

  • 공화국의 32년 가운데 헌법이 온전히 작동한 기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의 12년 남짓이다. 1932년부터는 대통령 긴급명령 통치가, 1934년부터는 군부 정권이 이어졌다.
  • 1918년 해방 포고가 수문을 마을에 넘겨준 날인 4월 22일은 공화국 시기 '수문의 날'이라는 공휴일이었다. 마을마다 수문을 열고 축제를 벌였는데, 이는 제정 시기 차르가 대관식에서 수문을 여는 '수문 의식'을 뒤집은 것이었다. 군부 정권은 1936년 이 공휴일을 폐지했다.
  •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에서 공화국은 '미완의 혁명' 시기로 불린다. 반면 1949년 인터그라드를 떠난 망명자들은 공화국을 '잃어버린 사랜드'라 불렀고, 공화국의 삼색기는 수십 년 동안 망명자 사회의 상징이었다.
  • 과도정부 총리 일리치는 망명지 루이나 벨포르에서 196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랜드 공화국 망명 정부'의 총리를 자처했다. 그러나 이 망명 정부를 승인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1] "흘레브, 제믈랴, 슬로보다!"로 읽는다. 1934~1945년 군부 정권기의 표어는 'Ред и обнова!(질서와 재건!)'였다.[2] 1934~1945년에는 〈재건의 노래〉가 국가였다.[3] 1920년 헌법으로 국교 제도가 폐지되었다.[4] 1934~1945년에는 국가재건위원회가 대통령을 지명했다.[5] 1934년 쿠데타로 해산되었다가 1946년 3월 총선으로 다시 구성되었다.